엽편소설)#1-284 비밀이에요

"한 번만 더, 딱 한 번만 더 보는 거야"
단호하게 마음을 먹어보지만, 잘 되지 않아요. 상처받은 얼굴을 하고서도 당신에게서 좀처럼 물러서고 싶지가 않아요. 어차피 사람의 마음이란 건 흐려지기 마련이니까. 당신을 계속 보다 보면 흐려질 거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것 또한 내게는 어려운 일이더라고요. 내게서 당신은 절대 옅어질 생각이 없고, 결단코 흐려질 생각이 없으니까요. 지독하리 만큼요.
당신도 이런 마음이었나요. 내가 아무리 조바심 내고, 어떻게든 당신의 마음을 사랑으로 돌려보려 해도 나를 받아주지 않았던 이유가, 그냥 두면 내가 스스로 포기할 거라 생각해서인가요?
당신은 이 관계가 끝나더라도 큰 타격이 없을 거라는 걸 알고 있기에,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는 거죠? 나빠요..
당신은 왜 나를 옆에 두었을까요.
나는 왜 당신의 옆에 있으려는 걸까요.
나는 왜 당신을 내 옆에 두었을까요.
당신은 왜 내 옆에 있었을까요.
당신과 나, 나와 당신은 서로의 관계가 꼬리처럼 물고 물어요.
마음을 주고받을 수 없다는 건, 결국 슬픔이라는 것을 왜 이제야 알아야만 했을까요. 지금 후회한들,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처음부터, 애초부터 예정된 결말이었으니까요.
그 빤하고 뻔한 결말에 이렇게 위태롭게 통째로 흔들리는 나는 참으로 고단하고 버거워요.
그럼에도 당신에 대한 마음이 쌓여만 갑니다. 마음을 주면 언젠가는 받고 싶어지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이 하는 일을 멈추게 할 수가 없네요. 당신에게서 도망치듯 숨어도 언제나 익숙하게도 기어이 나를 따라오는 당신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일어나지 않으려나 봅니다.

#외방향 사랑은 참 쓸쓸합니다
한 걸음 뒤에 있는데도 결코 돌아봐 주지 않으니까요. 봄에도, 여름에도, 가을에도, 겨울에도 결국 어느 계절이든 계절이 되지 못하고 말죠.
아련한 추억들이 흩어지지 않게 애써 모으고 있지만, 자꾸만 질척이는 감정들이 발목을 잡아요. 당신이 싫어할 텐데... 당신이 지겨워할 텐데... 하면서도 자꾸만 질척거려요. 마음이 소용돌이치는데 나는 맨몸으로 맞서고 있을 뿐이에요. 끊임없이 나는 당신에게 빠져들고 있어요. 당기고 밀리고 당겨지고 밀려지는 감정의 줄다리기는 언제쯤 느슨해지는 걸까요. 내가 어리숙해서 이런 건가요. 당신을 무척이나 사랑해서 이런 건가요.
물고 물리는 톱니바퀴처럼 맞닿을 수 없지만 당신을 사랑하는데 이유가 없듯이 사랑을 멈춰야 하는 이유도 끝내 찾지 못하겠어요. 매 순간순간이 처음인 것처럼 당신을 사랑하는 내가 문제인 거죠? 그렇죠?
당신은 언제나 어디서나 내게 다정했어요. 그 다정함은 더 이상 내게 다정하지 않고, 점점 잔인해지고 있어요. 자꾸 마음을 서랍장에 쑤셔 넣는데 더 이상 들어갈 공간이 없어요.
구태여 설명할 것 없이 어떤 느낌이냐면요.. 서랍 문을 열면 정리되지 않은, 헝클어진 감정들이 한꺼번에 와르르 쏟아지는 느낌이에요.
나를 더 좋아해 달라고 당신에게 보채게 돼요. 당신의 한마디에 서운해하는 나를 혹시나 질려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면서도, 당신이 무심코 뱉은 말이 압정처럼 내게 다다닥 박히곤 해요. 따끔거리는 상처에 밤새 잠 못 이룬 채 울기도 합니다. 가령 '좋아한다고 해도 그럴 수 없잖아요'라는 당신의 달콤한 목소리로 내뱉는 말이라던지, 당신이 사랑하는 여자를 굳이 나에게 예쁘다고 알려줄 필요까지 있었을까 하면서요.. 맞아요. 내가 먼저 물어봤어요. 그렇게 대답할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고요. 그런데 막상 당신의 입에서 들으니 상처인 걸 나더러 어떡하라고요. 나도 몰랐어요. 분명 당연한 대답, 예상한 대답인데 상처가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어요. 나 역시 말이에요. 나 그렇게 속 좁지 않고요, 샘 많은 여자도 분명 아니거든요. 그런데 왜 자꾸 어린애처럼 사랑을 확인하고자 당신을 맴돌까요....
당신을 사랑하면서 참 많이 울고 웃었어요. 시시때때로 떠오르는 당신으로 내 입은 수시로 반달을 그리고, 가슴 벅차게 행복했어요. 반면에 나와 같지 않은 당신은 꾸준히 내게 다정하셨지만 너무 아렸어요. 덕분에 무료하지 않은 삶이었다고 마무리해도 내게는 남는 장사지요. 이러면 또 뭐 하나요, 당신을 보러 가면 은근히 스치는 당신의 어깨에 또 와르르 무너져 내릴 것을요.
당신을 생각하면 두서없이 막 막 하고 싶은 말들이 쏟아져 넘쳐나요. 내가 작가인데도 내 마음을 글로 표현하기 어렵고, 벅차네요. 무슨 말을 또 하고 싶어서 이렇게 밑밥을 깔았냐면요..
당신을 직책 말고 이름으로, 호칭으로 부를 수 있는 자리에 서고 싶다고요, 그게 사실, 내 마음속 깊은 진심이에요. 그렇지만 그 자리는 내게 허락될 순 없으니까 또 꽁꽁 숨겨 놓고 모른 척해야 해요. 이건 진짜 짱짱 비밀인데요, 아직도 나의 평생 운을 써서라도 갖고 싶은 게 당신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