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 글쟁이/엽편소설

엽편소설)#1-220 보이지 않는 선

호호아줌마v 2025. 1. 23. 04:11


넘고 싶어도 쉽사리 용기가 나지 않는, '보이지 않는 선'을 살아가면서 암묵적으로 지키며 산다. 그 속에서 나는 되도록 지키며 살아왔다.
많은 선 중에서 가장 보편적인 '보이지 않는 선'은 바로 사랑이라 볼 수 있는 감정이다. 사랑은 누가 그 선을 먼저 넘느냐에 따라 사랑이 시작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선을 나는 넘어버렸다.
나는 분명, 그에게 감정의 선을 넘어버린 지 오래되었다.
허나, 쉽게 넘을 수 있었던 건 단연코 아니었다.
수없이 골머리 앓아가며 고민했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사랑의 감정을 내가 컨트롤할 수 있다는 안일한 생각으로 선을 넘었다. 소나기인 줄 알았던 내 사랑이 알고 보니 긴 장마였다. 긴 장마가 시작되었으나 언제 장마가 끝날지 아무도 모른다. 비가 쏟아져 내리고 있는 장마철 한가운데 나는 서 있다.
사실, 선을 넘기까지 얼마나 많은 선을 긋고 지웠는지 그동안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이 선을 선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지금, 넘어간 선을 다시 돌아와야 함도 분명히 알고 있다.
더 늦기 전에 돌아가야 한다.
돌아가야 한다는 걸 잊어버리기 전에..
돌아가기를 거부하기 전에...
돌아가야 한다.

#1 출판사의 요청에 의한 결말

발길이 닿는 곳곳에 작은 물엉덩이들이 퍽 마음에 든다. 바닥에 떨어진 낙엽 위로 사뿐히 내려앉는 비, 그리고 내리는 빗속을 하염없이 걷고 있다. 주머니 속에 소중히 쥐고 있는 손을 다시 꺼내 펼쳐보지만, 더 진해진 두줄을 확인하고서 주머니 속 깊이 집어넣는다. 그렇게 빗속을 걷고 걷고 또 걸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하늘, 달빛이 유난히도 약하다. 구름에 가려진 달빛의 모습이 몹시도 시리고, 몹시도 아프게 느껴진다. 꺼져가고 있는, 점점 사라지는 달빛을 보기 위해 여자는 창가 끝에 걸터앉았다. 발아래는 온통 얼룩진 단풍 위로 조용한 달빛이 온 세상에 촘촘히 내려앉고 있었다. 조금은 차갑게 부는 쌀랑한 바람도, 얼핏 보이는 달빛의 여운까지 모두 완벽했다.
창가에 걸터앉은 여자는 두 눈을 감고 두 사람을 떠올렸다. 미안하고 미안하기만 한 남자와 분명 사랑이지만 사랑일 수 없는 한 남자를. 사랑하는 남자를 가슴에 품고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사는 건 철장 없는 감옥이고 지옥이었다. 미안한 남자에게 더 이상 미안해하지 않기로, 사랑하는 남자를 마음껏 사랑하기로 다짐했다.

밝지 않은 달빛으로 온 세상을 촘촘히 밝히던 날, 여자는 달빛 속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차가운 바닥에 누워 본 달빛은 몹시도 서글펐으며, 한없이 어두웠다. 구름에 가려지는 달빛이 아쉬울 찰나,
조용히 비가 내렸다. 여자는 조용히 읊조렸다.

"비를 기다렸어"

차가운 아스팔트 위, 더 차갑고 빠르게 식어가는 여자는 여느 때보다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치 홀가분한 얼굴처럼 보였다. 달빛은 은은하게 여자를 비추고, 가을비는 사뿐히 여자 몸 위로 떨어졌다. 누워서 본 여자는 달빛과 내리는 비로 더할나위 없이 행복했다. 움직임이 느려진 여자는 천천히 배를 감싸 안았다.

'엄마가 미안해, 아가'

그렇게 깊은 밤, 가을 비는 소리 없이 여자 몸 위로 하염없이 내렸다.
열린 창가 사이, 비바람으로 펄럭이는 종이 한 장이 첫 남자의 눈에 들어왔다.

"미안하고 미안했어. 오빠.
미안하다는 말 말고는 달리 할 말이 없는 나를, 용서하지 마."

남자는 종이를 빠르게 뭉개버렸다. 그러다 뒷장에도 글자가 있는 걸 확인하고 다시 펼쳐 들었다.

"당신에게 가는 길은 그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가고 싶었습니다.
당신에게는 무해하고, 무해한 사랑만 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선택한 내 선택입니다.
부디 안온하시기를,
부디 행복하시
기를 바랍니다."


남자는 다시 한번 종이를 거세게 구겨버리고, 열린 창문을 거세게 닫고 휴대폰을 찾았다.

여기까지가 출판사에서 원하는 결말이다. 조금 더 살을 붙이고 다듬고, 스토리를 넣어 더 슬프고 더 애잔하게 결말을 써내야 한다. 해피엔딩까지는 아니더라도 이렇게 결말을 내고 싶지 않았지만 어쩌겠는가... 어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 공간에서만큼은 엽편소설이 다르게 쓰일 예정이라는 거..



#당신

이틀 전, 약을 먹고 일찍 잠에 든 날이었어요. 그날, 당신 꿈을 꾸었어요. 단번에 꿈인 줄 알았어요. 당신이 내게 이리 예쁘게 웃어줄 리 만무한데, 옥상에서 밤하늘을 가리키며 연신 웃으며 이야기하는 당신이 너무 좋아 고개를 떨구고 그만 엉엉 소리 내 울었어요. 그리고는 꿈에서 깼어요. 눈물에 젖어 무거워진 눈을 뜨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뭘 어디서부터 바로 잡아야 할지 모르겠어요. 하루가 멀다 하고서 당신에게만 향하는 요동치는 감정을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요...
당신과 함께 하고 싶어요. 단지, 내가 바라는 건 이거뿐인데 이 간단한 일이 내게는 하늘의 별따기만큼 무척이나 어렵고, 힘듭니다.
나를 제일 잘 아는 사람이 당신이기를 바랐고, 당신을 제일 잘 아는 사람 역시 나이기를 원했어요. 당신이 다른 누군가와 더 친해 보이면 괜스레 질투가 나기도 해요. 그러면서 이러면 안 되는 마음을 고쳐 잡고, 당신과 멀어질 생각을 하면 서러워집니다. 죄다 서럽다고요! 왜 내가 서러워야 하냐고요. 짝사랑 한 번 잘 못 시작해서 이렇게도 호되게 아플 줄은 누가 알았냐고요. 설마 내가 미련하고 못나서 이렇게 아픈 겁니까. 다들 사랑하는 사람 만나 사랑하다 이별하면 잘도 또 다른 사람 만나 더 잘 살기만 하던데 왜 나만 이 모양인가요. 아.. 저들과 나는 다르지요? 그러네요. 나는 사랑해서 안 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지요. 너무 많이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서... 사랑해서 안 되는 사람인 걸 잊고 있었어요.
그럼 사랑하면 안 되는, 금지된 사랑에 대한 집착일까요? 하지 말라, 하면 안 된다고 하면 더 하고 싶은 것처럼?
그럼, 우리, 만나볼래요?
그럼, 나 좀 만나줄래요?

만나보고 아니면 두말없이 돌아설게요. 그런데 만나보고 당신이 정말 맞다면 어쩌죠... 지금보다 더 할 텐데, 다 버리고 당신에게 가겠다고 떼쓰고 보채고 하면 어쩌죠. 그럴 것만 같아서, 그럴 것이 너무도 분명하기에 위에 말은 취소할래요. 취소해야겠어요.

하... 밤이 너무도 깁니다. 달빛과 별빛이 창가에 비추는 밤을 좋아해요. 어두운 밤하늘을 자신을 밝혀 세상을 밝히는 달빛과 별빛을 좋아하는 이유가 뭔지 아세요? 나요, 어렸을 때 귀가 시간이 '해가 지기 전'이었어요. 여름이 그나마 외출시간이 길었다고 볼 수 있죠. 10대 때는 바쁘다는 핑계로 밤하늘을 본 적이 없었어요. 그러다가 대학생 때는 귀가시간이 10시까지였어요. 그런데 늘 귀가시간이 쫓기다 보니 하늘을 볼 시간이 없었어요. 내게는 밤이 그냥 밤이 아니었어요. 그때는 동경의 대상이었던 거죠. 늦은 밤 길거리에 다니는 사람들이 마냥 멋있어 보였어요. 나도 어른이면서 밤길을 걷는 사람들을 동경했었어요. 부러웠고요. 그러면서도 밤이 점점 무서웠어요. 경험해보지 못한 어둠이 꼭 나를 삼켜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거든요. 그러다 직장 생활하면서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잔뜩 마셔 취했던 적이 있었어요. 뭐 그래봤자 맥주 한병도 안 마셨겠지만요... 아빠가 데릴러 오신다는 연락을 받고, 폴라포 하나 입에 물고 벤치에 앉아 무심결에 올려다본 밤하늘이 너무도 눈부시게 아름다웠어요. 커다랗고 노오란 달이 무척이나 밝더라고요. 예기치 못한 달이 너무 멋있고 예뻐 보여 울컥하고 눈물이 차올랐어요. 아마도 술기운 탓인 듯해요^^;; 그랬더니 눈물로 달빛이 번져 보이는 것도 한없이 예쁘더라고요. 마치 절대적이라 생각했던 어두운 밤에도 주인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무슨 말이냐면요, 내게는 마냥 무섭기만 한 어두운 밤이 달과 별이 내는 빛으로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는 걸 그때 처음 깨달은 거죠. 그걸 계기로 밤을 무서워하지 않게 되었어요. 오히려 그동안 몰랐던 밤하늘의 아름다움을 늦게 알아버린 것이 조금은  속상했었어요. 그때부터 달빛과 별빛은 내 글에 자주 등장하게 되었어요. 아, 비도 마찬가지고요. 당신도 마찬가지예요. 내가 사랑하고 동경하는 비와 달과 별, 그리고 당신입니다. 내 글에 자주 등장하는 주제들이기도 하고요. 밤마다 떠오르는 당신이 그리워 창가에 앉아 달빛과 별빛을 보며 당신을 그려봅니다. 내 취미이자 특기입니다. 내 이야기는 이제 다 했으니, 이제 당신 차례예요^^
보고 싶어요, 당신이.
알고 싶어요, 당신이
깊이 사랑하고 있어요, 당신.

항상 같은 패턴이지만요, 당신을 그리워하다 조금은 감정이 가라앉을 때면요, 나는 오늘도 당신이 행복한 일들만 넘쳐나기를 간절히 기도해요. 당신을 슬프게 하거나 화나게 하는 것들은 내가 오지 못하게 막아 줄게요. 그러니 행복하시라고요. 항상.
쿨쿨 잘 자고 있겠지만,
잘 자요, 당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