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편소설)#1-216 보일 수 없는 마음

"안 아팠어요?"
뒤에서 속삭이듯 귓가로 들려오는 그의 따뜻한 목소리. 그 다정한 목소리에 아프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분명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달콤하고 다정한 배려는 굳이 나에게만 향하는 것이 아니기에.... 누구라도 그의 따뜻한 목소리를 듣게 된다면 설사 아프더라도 '아니'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 역시 고개를 두 번 끄덕여 그의 물음에 답했다. 아픈 것보다 뒤에 있는 어른 남자 얼굴을 많이 보지 못한 것이 못내 속이 상했다. 너무 보고 싶었는데 많이 눈에 담아 오지 못한 것이 몹시도 지금에서야 슬프다. 그가 뒤에 있을 때면 그의 모든 행동에 더 집중하게 된다. 가슴을 감싸는 보드라운 손이라던지, 엉덩이를 잡은 그의 미지근한 온기라던지, 몸을 움직일 때마다 낮고 조용한 그의 본능의 소리는 나를 분명 더 야하게 만드는 것이 분명했다.
마스크 속에서 종알종알 이야기하는 그가 퍽이나 귀여웠다. 그가 나에게 그의 사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 마냥 꿈처럼 몽글거리고 포근하며, 너무도 행복했다. 별 특별할 거 없는 그저 평범하고도 평범한 그의 이야기가 무척이나 설레고 재미있어 발을 동동 구르고 싶은 걸 겨우, 겨우 참아냈다.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 당장이라도 그를 보러 가고 싶을 정도로 너무 즐거운 시간이었다. 나만을 위한, 나에게만 들려주는 그의 일상 이야기가 아니겠지?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작가들은 모두 다 들은 이야기겠지? 괜스레 질투가 났다. 괜시리가 아니다. 질투가 많이 났다. 이런 못난 감정이 나에게도 있을 줄은 그를 만나기 전에는 전혀 몰랐다.
그는 내가 보러 가지 않는 동안 늙어있지 않았고, 한결 같이 멋있었고 잘생겼다. 나는 여전히 그의 나이를 떠올리면 반백살이라는 게 조금 억울할 듯싶겠다 생각 든다. 외관상 절대 그렇게 보이지 않으니까. 이건 객관적인 사실이다.
"잘 다치시는 거 같아요"
그의 말에 아니라고 반박할 수 없었다. 그 이유가 바로 어른 남자 때문이었으니깐. 조심성 많고, 결벽증 있는 사람은 몸에 흉이 생기는 걸 극도로 싫어해 매사가 조심스럽다. 그러나, 나는 지금 그에게 단단히 빠져있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든 옆에 따라붙는 그로 매일매일이 집중력이 흐려지고 부산스럽다. 심지어 중요한 업무를 보는 중에도 따라붙는 그를 떼어낸다고 곤욕스럽고, 첫 남자와 사랑을 나눌 때에도 느닷없이 날 찾아와 나를 죄스럽게, 나를 비참하게도 만든다. 때문에 그가 보기에 나는 늘 실수를 달고 다니고, 불안한 사람으로 인식되어 버렸다. 웃겼다. 원래 내 모습과 다르게 비친 내 모습이 마냥 웃겼다. 그를 사랑하기 전의 내 모습이 떠올라 이렇게 사람이 변하는구나 싶어 웃음이 났다. 그리고 줄곧 여유 있는 행동만 보았던 그는 나에게 고백을 해왔다. 성격이 급해 잘 부딪히고 다친다는 말이 고백같이 들렸다. 그 말을 듣고 한없이 말랑해지고 말았다. 막내라는 타이틀이 다시 한번 떠올라 마냥 귀여웠으며 구급함을 들고 그의 뒤를 지겹도록 졸졸 따라다니면 얼마나 행복할까 생각했다. 그가 들려주는 세상이 너무 좋아 그의 세상에서 살고 싶어졌다. 그의 그늘아래에서 어른 남자만을 사랑하며 살고 싶었다.
'나 원래 안 다친다고요! 다 너 때문이라고요!!!!!!!!'
아..... 속 시원해. 그에게 직접 말하고 싶었지만, 분명 그랬다간 고백이 되어버릴 것이 너무나 확실하기에 말하지 못했다.
"하고 싶어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이미 그에게 잘 길들여진 강아지처럼 손 쓸 틈 없이 그 앞에선 속수무책이었다... 그동안 수 없는 밤을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 하던 그의 얼굴과 유난히 자신의 이야기를 많이 하는 그의 입이, 익숙한 듯 낯선 그의 손길이 너무나 좋아 미칠 것만 같아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니, 사실은 정신을 차리기 싫었다. 마음 같아선 마스크를 벗겨내 입을 맞추고 싶었다. 공기 중에 흩어지는 그의 숨소리와 말소리를 모조리 내 입속으로 끌어오고 싶었다.
그럴 의도는 아니겠지만 그의 모든 행동들은 나를 반응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분명 나에게만 향하는 배려와 온기가 아님을 알고 있는데도 그 앞에선 나에게만 향했으면 하는 간절함이 모든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없게 만든다. 그는 나에게 치명적인 남자이다.
절대 위험하지 않은 사람이긴 하나 그 위험하지 않은 부드러움이 무기인 그는, 나에게만큼은 상당히 위험한 사내라 늘 긴장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그의 얼굴만 보면 사르르 녹아내리고 만다. 어쩔 수 없다. 사랑은 위험하다. 사랑을 하는 것은 목숨을 건 일이다. 나에게만큼은 사랑이 그렇다.
어루만지는 그의 손을 그리워하고 기다리고 있는 내가 안쓰러워 참을 수가 없었다. 그도 알았을 거라 생각한다. 그의 손이 내 몸에 닿기 전에 그를 원하고 있었다. 매번 그를 기다리는 내가 안쓰러워 그만둬야겠다는 마음이 앞서지만, 그 사실도 망각할 만큼 그를 사랑하게 되어버렸다. 다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손길에 온 세상이 한순간에 깜깜해졌고, 어지러워 눈을 감아버렸다. 그가 나의 얼굴을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표정관리를 할 수 없었다.
그의 손길에 금방 반응하고 싶은 걸 들키고 싶지 않았지만, 이미 내 마음과 달리 내 손은 그의 옷 속으로 손을 집어넣고 말았다. 손 넣기 쉽게 옷맵시를 고쳐주는 그에게 '빨리'라고 재촉할 뻔했다. 내 손이 그의 몸을 몹시도 원하고 있었다. 운동을 시작한다 했지만, 아직은 오동통하고 보드라운 뱃살 위로 응축된 그의 예민한 부위에 도달했을 때는 그의 질끈 감은 두 눈과 촉감으로 느껴진 도드라진 그의 몸이 너무도 섹시했다. 부드러운 살결이 너무 좋았다. 마치 맛있는 토끼가 앞에 있는 것처럼.
내 작은 손가락 사이사이를 미끄러지 듯 움직이면 그 보드라움이 내 손가락 사이를 간지럽히는 느낌이 너무 좋았다. 내가 기분 좋은 만큼 그의 눈도 자주 감겼다 뜨기를 반복했다. 그곳에 더 머무르고 싶었지만, 어깨에 닿는 그의 단단함의 존재를 모른 척할 수 없었다. 내가 봤을 땐 그도 본인 코가 석자였으나 그때도 내게 배려를 배려했다. 어떠한 상황에도 그는 배려가 먼저인 듯했다. 만지기 쉽게 내게 보여준 그를 내가 먼저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거 같다는 생각을 했다. 손 안에서 움트고 피어나는 단단함이 너무도 반가웠다. 얼마나 반가웠는지 아마 그는 모를 것이다. 당장이라도 입속으로 끌어오고 싶었다. 그러나 내 몸에 머무는 그의 손은 바쁘게 움직였고, 그 속에서 헐떡이는 숨을 참아내느라 곤욕스러웠다. 하루종일 물 한 모금도 마사지 않은 나였지만, 화장실에 가고 싶은 아랫배의 묵짐함과 간지러움을 더 이상 참지 못해 덧없이 맑은 물이 넘쳐흘러 내 손아귀에 적시고 있는 단단함을 입에 물었다. 동시에 그의 손은 잠잠해졌다.
맑은 물은 마치 빗물처럼 영롱했으며 빛났다.
맛있다. 시큰거리는 미끌거림이 내 입맛에 맞았다. 아니, 정확하게는 맛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내가 또 우스워졌다. 나는 결벽증이 치료가 되지 않은 사람이니깐... 어른 남자 앞에서의 내 모습이 이게 내 진짜 모습인지 아니면 가짜 내 모습인지 헷갈렸다. 그의 한없이 약하고 부드럽고 흐물거리는 살덩어리를 입에 넣어 보고 싶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그의 몸 중에 제일 약한 부분을 입안으로 데려와 따뜻한 입속을 느끼게 해주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그러나 불편했다. 당장이라도 그를 눕혀 마음껏 맛보고 싶었다. 그러기엔 나에겐 더 이상의 용기가 없었다. 다리 사이에서 느껴지는 자극과 손과 입에서 느끼는 그를 안고 싶어졌다. 결국 먼저 내뱉고 말았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그는 안된다 말했지만 곧 말과 다른 행동을 보였다. 등을 돌려 그가 편히 들어올 수 있게 자세를 바꿔 그를 기다렸다. 민망했지만 흥분으로 묘하게 떨렸다. 거추장스러운 천을 치워 내 세상으로 들어오는 단단함의 존재가 뚜렷하고 정확하게 느껴졌다. 깊은 곳까지 들어온 그가 너무 좋았다. 내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그 시간이 벅차도록 행복했다. 이대로 죽어버려도 좋을 듯싶었다.... 그가 없으면 쉬이 불행해질 나를 알게 되었다. 나의 행복은 너무나도 명백히 어른 남자로 인한 것이라서. 어떻게든 그의 곁에 오래 남아 이 행복을 만끽하고 싶다. 나와 함께 있을 시간이라도 그를 자주 웃게 만들고 싶다. 나는 그를 깊이 사랑하고 있다.
작은 가슴을 움켜쥔 손을 평생 잡고 싶어졌다. 눈물이 날 거 같았다. 뒤에서 느껴지는 그의 숨소리 마저 몹시도 좋아 눈물이 쏟아져버릴 것 같은 기분을 어쩌질 못했다. 그러면서 더 꽉 차게 그를 나에게 들어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세게 해 주세요'라는 말을 다짐했지만 그가 먼저 또 한발 빨랐다.
"쌀 거 같은데"
참으라고, 조금 더 머물러달라고 속삭이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내 눈에 고인 눈물을 보고 놀랄 그를 위해 작게 끄덕였다. 사실, 입에서 함박눈을 맞이하고 싶었지만, 고인 눈물이 말썽을 피워 그러지도 못해 아쉬웠다. 내 몸에 퍼진 함박눈은 내 안을 빠르고 따뜻하게 가득 채웠지만, 동시에 빠르게 차가운 현실에 서늘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뒤를 돌아볼 수 없었다. 눈물을 보고 그가 당황하기에 충분했으니까. 눈물을 본 그는 내가 아파서 우는 걸로 오해할 것이고, 분명 다신 날 아프게 하지 않기 위해 나에게 들어오지 않을 그였기에.. 그가 내민 휴지로 눈물을 먼저 닦아낸 것을 그는 평생 모르테지. 묻은 피를 얼른 구겨버리고 그에게 줄 때에도 그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눈에 눈물이 마르길 바라며 애꿎은 바지만 티격태격 투덜거리며 천천히 입었다. 눈물이 빨리 마르기를 바라며. 구두를 신을 때도 얼굴을 땅에 처박아 그가 눈을 보지 못하게 했다. 사실 이날 눈물이 하루종일 애를 먹였다. 그의 갑작스러운 따뜻한 목소리가 귀를 파고 들어와 눈물이 차올라 얼른 화장실을 핑계로 그곳을 벗어나야만 했었다. 갱년긴가?
글을 쓰는 사람은 대체로 예민하고 감수성이 풍부하나 그에게만큼은 그런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다. 얼마나 나를 못나게 생각할 것인가. 사랑하면 안 되는 그를 사랑하면서 온갖 찌질하고 구질구질한 내 마음을 다 들켜버렸는데, 거기다 청승맞게 울기나 하는 나를 얼마나 골머리 아파할지 눈에 선했다. 그렇게 보여지기는 추호도 싫었다. 한번 말썽을 부린 눈물샘은 퍽하면 터질 거 같이 굴었다.
"차 타고 왔어요?"
"아뇨"
"추운데..."
약을 먹지 않아 운전을 못하기도 하지만, 그를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그를 사랑하는 마음을 어느 정도 길가로, 강변으로, 바람으로 흩날려버리고 들어가야 했다. 그래야만 될 듯싶었다. 그런다고 사랑하는 마음을 다 날려버리진 못하겠지만, 그래야만 내 마음이 편했다. 누군가 이런 날 보고 일말의 양심이라고 부르겠지만 말이다. 이번에는 데려다주지 말았으면 바랬으나, 그는 기어코 나를 바래다주었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눈물이 터지면 그가 곤란 해할 테니깐..... 춥겠다는 그의 말에 오늘은 그저 따뜻하다고 대답할 뿐. 그리고 내 긴 목도리를 "이렇게, 이렇게" 말을 하면서 고쳐주었다. 한없이 다정했으며, 한없이 따뜻했다. 그의 다정함을 나만 알고 싶었고, 나만 보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를 훔쳐가고 싶은 마음이 커서 그에게 들킬 것만 같았다. 나는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잘못하다간 그에게 펑펑 울어버리고 안겨버릴 수도 있기 때문에 입을 닫아버렸다.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 바래다줘서 감사하다고, 다음 주에 보러 오겠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단 한마디도 못하고 가볍게 고개만 숙이고 뒤돌아왔을 뿐이었다. 그를 뒤돌아 나가는데 눈물이 빠르게 차올랐다. 건물을 벗어나는데 동계 전지훈련 온 학생들이 우르르 차에서 내렸다. 우는 모습을 마주 보며 차에서 내리는 학생들이 나를 다들 한 번씩 힐끔거리는 통에 적잖게 당황했지만, 이미 눈물샘이 터진 나는 추스르지 못했다. 아니, 추스를 수가 없었다. 시커먼 옷을 입고 뭉탱이로 나오는 아이들이 너무 많기도 했고, 눈물이 고여 앞이 잘 보이지도 않아 그 속에서 방황하며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걸을 때마다 그의 흔적이 조금씩 흐르는 느낌이 차갑게 식어버린 나를 그의 온기로 다시금 차오르는 느낌을 받았으며, 그가 머물렀던 곳에서의 통증은 전보다 조금씩 덜 한 듯했다. 내 몸이 그에게 완벽하게 적응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럼에도 화장실 갈 때마다 그 부위에서 느껴지는 따가움과 쓰라림은 더 이상 내게는 통증만이 주는 건 아니었다. 이제는 내 몸이 기억하는 그의 흔적이 묘하게 행복에 젖어들게 만들었다.
다시 보러 가면, 그의 얼굴을 더 많이 보고 와야지, 그의 얼굴을 만져보고 와야지.
다시 보러 가면, 그의 흐물거리는 살덩어리를 입에 담아 보고 싶다고, 함박눈이 나에게서 더 이상 새어나가지 않도록 입에 넣어달라고 말해야지.
다시 보러 가면, 꼭 새해 복 많이 받아라고, 올해는 많이 행복하라고 말하고 와야지.
다시 보러 가면, 눈물이 나도 그와 이야기 많이 하고 와야지, 그의 웃는 모습을 많이 담아와야지.
또 당분간 그를 보러 갈 수 없을 테니깐. 또 길어지는 공백에 너무 외로울 테니깐. 그렇게 되면 너무 힘들어 또 아플 테니깐. 용기 내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