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편소설)#1-214 말할 것도 없이

#출근길
나는 출근하는 시간이 그렇게 좋더라.
아침에는 늘 부산스럽다. 그 마저도 웃기다.
수없이 아침을 맞이하는데도 매번 한결같이 부산스러울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좋아하는 옷을 입고, 가방을 메고, 구두를 신으면 출근 준비 끝!
이어폰 사이로 흘러나오는 노래,
나의 우울한 기분을 바깥공기와 함께
저 멀리 날아가는 기분.
평온하고도 웃음이 나온다.
'바다가 보이는 마을-마녀 배달부 키키'
수없이 무한 재생되어 내 두 귀로 흘러오는 노래. 한번 꽂히면 질리도록 한 곡만 듣는데 요즘 이 노래만 내 귀에 줄곧 흘러나온다. 며칠 전, 모두가 잠든 늦은 밤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소주의 힘으로라도 푹 자고 싶었던 만큼 몸도 마음도 힘들었을 때였다.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편의점에서 소주 한 병을 사 왔다. 소주와 머그컵 그리고 빨대를 올려놓고는 막상, 그런 내가 몹시도 가엽게 느껴졌다.
가여움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허탈감, 허무와 같은 날 향한 안쓰러움이었다. 그렇게 식탁에 앉아 초록색 영롱한 소주병과 마주 보고 앉았다. 시원한 소주병과 그렇지 못한 집안의 온기로 영롱한 빛을 담고 있는 소주병은 이슬을 머금다 결국은 내 앞에서 울기 시작했다. 하염없이 우는 소주병이 안쓰러워서 내가 얼른 마셔주기로 다짐했다.
그러나 한 입도 마시지 못했다. 소주병을 열 수 없었거든. 아무리 힘을 주고 돌려도 도통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발과 손이 함께 호흡을 맞춰 돌려도 꿈쩍 하지 않았다. 나쁜 소주병. 치아로 열면 열 수 있었겠지만, 그땐 정말 몸이 너무 아파서 치아로 뚜껑을 연다는 상상만으로도 몸이 움츠려 들었다.
하여, 나는 다시 소주병과 마주 앉았다. 마주 보고 있는 것만으로 취하는 거 같았다. 아마 항생제 덕분인 듯싶다. 말할 것도 없이 나는 그를 떠올렸다. 그리고 소주병을 집어 들고 생각했다. 병뚜껑 하나 제대로 열지 못하는데, 당신은 얼마나 많은 병뚜껑을 열었을까. 또 술을 따르며 술잔에 술이 채워지는 것을 보며 당신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당신이 한잔 들이켤 때마다 한숨이 뒤섞여 있을지 궁금했다. 하지만 물을 수 있는 질문이 아니었음에 고개를 저어버렸다. 이것이 바로 나와 당신 사이의 간극이다. 알고 있으면서도 자꾸 아프고, 매번 슬프다. 내게는 아직 더 많은 슬픔과 아픔으로 남을 당신이.. 나를 더 슬프고 더 아프게 하겠지?
조명에 비친 영롱한 초록스러운 소주병과 마주 보고 앉아있는데, 몹시도 당신을 잊고 싶었다. 영영 내게서 지워내고 싶었다. 더는 당신을 쫓지 않고, 더는 당신을 기다리는 일이 없기를 바랐다. 더 이상 울지 않는 소주병은 자기와 함께 하면 그럴 수 있다고 유혹하는 거 같았다. 웃겼다.
모두 다 웃겼다. 사실 당신은 어디에나 언제나 내 곁에 있었다. 내 옆에 존재하지 않지만, 늘 존재했다. 당신이 보고 싶어 눈을 감으면 당신이 어느덧 내 옆에 와주었고, 당신이 그리워 맞잡은 손은 미지근한 내 온기마저 당신이었다. 눈을 감고 당신을 떠올리면 나는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조금 더 깊이, 더더욱 당신과 함께 하고파 최대한 눈꺼풀을 무겁게 만들고 온 신경을 집중해서 당신과 함께하려 했다. 환영이라도 좋았다. 점점 눈을 감고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환영이라는 사실이 점점 자각하게 만들어 나를 괴롭히기 시작하지만 그 마저도 좋은 건 사실이다. 당신은 이토록 절절한 내 마음을 알게 된다면... 어떨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양치와 세수를 했다. 쓸데없는 상념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노력한 셈이었다. 싸~한 치약의 여운과 찬물로 세수한 덕분에 조금은 맑아진 듯했다. 그러나 뽀송한 수건으로 얼굴을 닦는데 그만 다시 당신이 그리워지고 말았다. 미지근한 수건의 온기에 의도치 않게 당신을 떠올리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거울 앞에 섰다.
당신을 보러 가면 당신이 보게 될 내 얼굴은 아파 보였고 생기가 없어 보였다. 거울에 비친 나는 입꼬리를 올려보았다. 나는 다시 또 생각했다.
당신이 웃으면 세상 전부를 가진 듯한 기분이라고....
그러고 다시 생각했다. 당신은 날 보고 무슨 생각을 할지. 그리고 또 꼬리를 물었다. 나와 같았으면.....
그러나 나는 안다. 한사코 궁금해하지 않아야 한다는 걸. 사랑했고, 사랑했으니 그걸로 된 거다. 그러니 이만 해라.. 내가 나에게 주는 조언과 충고가 전혀 먹히지 않는다.
내게 있어서 당신은 너무 어렵습니다.
아마 전부 추운 겨울 탓이겠지요? 그렇지요?
죽어가는 생명력에 정황상 우리는 결코 이뤄질 수 없다는 신호를 보내오고 있습니다. 나는 봄이 오기 전까지 오랫동안 기척이 없을 것입니다. 죽어가는 것들이 생명력을 얻는 봄이 오면 그때는 나 당신을 더 이상 쫓지 않으렵니다.
결국, 소주를 몰래 사러 갔던 날은 내가 원하는 바 모두가 이뤄지지 않았고 잠도 들지 못했다. 그렇게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려다 넷플릭스 마녀 배달부 키키를 틀어놓고 한참을 울었다. 그때 들었던 노래가 '바다가 보이는 마을'이었고, 그 노래가 가여운 나를 해가 뜰 때까지 위로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