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편소설)#1-212 외로움이 그리움으로

나는,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고,
사랑해서 안 되는 사람을 사랑하며,
사랑해야 할 사람을 사랑하지 않았다.
창가에 비치는 내 모습을 보고
울컥하며 터지고 만다,
그리움이었다.
공평하게 주어진 순간들은
한 줌 빛처럼 빠르게 스쳐 간다.
남겨진 찰나 그 마저도
온전히 당신과 나의 것이 아니며
해와 달이 함께 밝지 못하는 것처럼
멀어지고 만다.
허락된 단편의 남겨질 순간을
당신의 숨결로 물들여
기억의 달빛에 새겨두고 싶다.
당신은 앞만 보고 가세요.
나는 그런 당신을 보면서 가겠어요.
'가슴에 묻다'라는 말이 있다.
누군가를 사랑하지도, 잊지도, 버리지도 못하는
슬픔과 고통을 온전히 혼자 껴안고 살아간다는 의미이다.
나는 그를 가슴에 묻기로 했다.
도저히 끊어낼 수 없는 그를 껴안고 살아가겠다.
계절 따라 흩어질 설렘,
꽃잎 따라 스러질 인연을
피는 봄 속에 당신을 묻는다.
느티나무 잎에 무성할 동경,
내리쬐는 햇빛 따라 선망을
뜨거운 여름 속에 당신을 묻는다.
바래고 흔들리는 나뭇잎
가지 말라 붙잡으며
닳아버린 마음 정신없이 뒹굴어
저무는 가을 속에 당신을 묻는다.
서슬 퍼런 칼바람 불어
아픈 사랑에 등 돌린 채
시리고 시린 겨울 속에 당신을 묻는다.
매일이 다른 계절에 당신을 묻다 보면
그 위에 두터운 흙으로 덮어지지 않을까.
잊을 수도, 사랑할 수도 없는 당신을
저 차갑고 차가운 흙 속에 묻을 것이다.
더 깊이, 더 깊숙이.
절대 파낼 수 없을 만큼.
쉽게 찾아서 파내지 못할 만큼.
결국, 나는 당신을 잊을 수 없어 묻어두기로 했다.
당신을 내 가슴에 묻기로 했다.
이미 정해져 있는 일에
슬퍼 마라.
내 탓이 아니다.
그냥 길을 잘 못 들인 게다.
다독여보지만,
사랑은 머리와 가슴이 하는 일이 다른가보다.
당신은 잊혀짐이 아니라 잊는 것이다.
나의 의지로 온 힘을 다해 당신을 밀어내는 것이다.
하여, 미련은 부질없는 것이다.
추억이 감정을 뒤흔들고
그리움이 마음을 엉망으로 만들어도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고요한 달빛이 창문 위로 스며드는 밤에는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 참으로 많다.
내 마음속에 머물러다오.
나를 간직해 다오.
날 잊어 말아 주오.
나를 기억해 다오.
나를 품어다오.

#이해바라지 않는
'만지고 싶어'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몸소리 쳐졌다. 오랜만에 출근해 탕비실에서 다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앉아서 떠드는데 언제부터 이야기가 들리지 않았고 온통 그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내 옆에 있던 직원이 핫초코가 담긴 머그컵만 만지작 거리는 나의 손을 검지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모든 눈이 내게 쏠렸다.
"과장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아냐, 무슨 이야기했어??"
"너 어디 아파? 입술에 색이 없어. 오늘까지 쉰다더니 푹 쉬고 오지 그랬어?"
언니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물었다. 새해가 지나고 올해 처음 보는 사무실 사람들에게 애써 웃어 보일 순 없었다. 그럴 힘이 없으니깐.
원래는 그 틈에서 조잘조잘 박수까지 치며 한껏 떠들어댔겠지만, 그럴 힘이 어디에도 없었다.
내 자리로 돌아가 그동안 밀린 일들을 위해 양반다리를 하고 바짝 당겨 앉았다. 가볍게 손과 목을 흔들며 일에 집중력을 높이려 할 때였다.
"과장님, 체하셨어요??"
내 옆에 직원이 내 손끝을 닿으며 물었다.
"아니? 왜?"
"아까 손이 너무 차서요"
"괜찮아, 원래 좀 차"
"추울 땐 따뜻하게 입고 오시지. 치마를 뭐 한다 입었어요"
"누가 보면 오피스 허즈밴드인 줄 알겠어요...ㅋㅋ 오늘 내방 고객 많다고 단정히 입고 오라는 단톡 못 봤어요?"
"그래도 너무 추워 보여요"
"둔한 것보다 나아"
"핫초코 미, 아니, 오늘은 생강차 차드릴 까요?"
"아니, 핫초코미떼 진하게 부탁드려요^^"
그러고는 잠시 후 생강차를 머그컵 잔뜩 타왔다. 이럴 거면 뭐 하러 물어본 거야. 지 맘대로 타올 거면서... 썅..
"기침에는 생강차가 최고예요. 다 나으시면 핫초코미떼 타드릴게요"
"고마워요"
다시 슬리퍼를 벗고 양반을 개고 바짝 당겨 앉았다...
"과장님!!"
"또 왜 불러요!"
"무릎 담요 갖다 드릴까요?"
"아니, 필요 없어요"
가방 안에서 무선 이어폰을 꺼내 귀에 끼웠다. 더 이상 부르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다시 자세를 고쳐 잡고 집중하고 있을 때였다. 옆에 직원이 기어코 차에 가서 무릎담요를 가져와 내게 주었고, 추운 날씨만큼 차에 있던 담요는 굉장히 차가웠다. 스타킹 위에 닿는 서늘함에 잔뜩 몸을 웅크렸다.
"놀라셨어요??"
"아니, 담요가 차가워서. 고마워요, **씨"
다시 그가 내게 건넸던 담요를 뺏어 들어 열선풍기에 데우러 갔다. 부담스럽기 그지없는 행동이었다. 과해...
곧이어 데워졌는지 다시 내게로 가져왔다. 붉은색을 띠고 있는 열선풍기에 데워 따뜻할 거라 짐작했었는데, 너무나 미지근했다. 마치 그와 함께 있는 듯 느껴졌다.
순간 보드랍고 미지근한 담요가 그의 맨살과 같다고 생각 들었다. 순간적으로 충동이 들었다. '아, 그를 만지고 싶다.' 이내 나는 혼란스러워졌다. 요즘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뜨거워요??!!"
다급히 묻는 직원을 올려다봤다. 분명 울진 않았다. 내 기억엔 눈물이 차오른 적이 없었건만,
"왜 또 우십니까ㅠㅠ 제가 뭘 잘 못했어요?"
"내가 맨날 우나요??!!! 담요 고마워요, 이제 일 보세요. **씨 마감 다했어요?? 나 일 많이 밀렸고, 고객 오기 전에 끝내고 병원 갈 거예요"
엉뚱한 곳으로 화살이 날아가버렸다. 화풀이를 그 직원에게로 향하면 안 되는 것이란 걸 분명 알고 있었지만, 다시 말을 걸고 싶진 않았다.
그럼에도 내 팀원이기에 가방에서 약과 3개와 사과모양 포스트잇에 못쓰는 글씨를 또박또박 적어서 건네주었다.
'**씨를 겨냥한 화살이 결코 아니었어요. 나에게로 향했어야 했는데 미안해요. 오늘도 열일합시다^ㅡ^'
비, 미지근한 온기, 전복, 바나나, 굴, 계란찜만 보면 온통 내 머릿속을 쉽게 차버리는 그 사람 때문에 일이 꼬이기 시작한 지 사실 조금 지났다. 문제는 이 모든 것이 내 삶에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를 보러 가야겠다. 너무 보지 않아 그의 흔적들을 찾는 나를 이대로 내버려 둘 수 없다. 그러나 그에게 가려면 꼭 해야 하는 일이 하나 있다.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숨겨야 하는 일. 그럴 수 없으면 그에게 짐이 되기에. 그에게 부담이 되기에. 그가 나에게 그런 마음을 가지는 건 추호도 싫으니까.
꽁꽁 숨겨두면 그는 기어코 모를 것이다. 꽁꽁 숨겨두지 않아도 그는 조금 둔한 편이라 괜찮을 것이다. 당신을 많이 사랑하고 있다는.... 티만 안내면 되는 거야. 그래, 눈만 안 마주치면 되는 거야. 쉽잖아. 할 수 있지?? 할 수 있다고 말해야 갈 거야. 어때, 할 수 있겠어?
'무조건 할 거야'
'그래, 그럼 가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