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편소설)#1-196 나와 같지 않아

여태껏 단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사랑이었다. 나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던 지난날의 사랑이었다. 분명하게 말하지만, 나에게 흠이 있거나 내 외모가 타인에게 혐오감을 불러일으킬 정도는 아니다. 뿐만 아니라 성격도 뭐 엄청 모가 나있거나 뾰족 뾰족한 세모 또한 아니다. 스물아홉, 여름이 될 때까지 다들 "모태솔로"라 부르긴 했지만, 그동안 단 한 번의 사랑고백도 받지 못한 별 볼일 없는 그저 그런 여자는 정녕 아니다. 굳이 핑계를 대자면 '남자가 시간과 돈을 쓰는 건 목적이 있다. 그 목적을 간파하라'는 아빠의 주입식 교육을 잘 받았다고 볼 수 있고, 또 하나는 내가 사랑에 빠질 상대를 그동안 만나지 못했을 뿐이었다. 뭐 그렇다고 눈이 엄청 높거나 백마 탄 왕자를 기다리는 것 또한 아니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결국 첫 남자를 만나게 되었고, 사실상 한 번도 사랑을 못해본 비련의 여자가 되어 살고 있었다. 그 생활도 나름 만족했다. 사랑을 해본 적이 없어 사랑을 동경했지만, 동시에 사랑을 무시했다. 사랑은 영화나 드라마 그리고 책 속에서 상업적인 상술로 만들어진 언어의 유희 그쯤이라 치부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내 직업이 사랑의 이야기를 글로 담아내는 작가이다 ㅎㅎㅎ죄다 모순이었다. 사랑을 갈구하면서도 사랑을 무시하고 증오했으며, 그러면서 또 사랑을 동경하고, 사랑을 하고 싶어 했다. 여러 종류의 사랑에서 특히 남녀 간의 사랑은 형태조차 가늠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평생 못한 사랑에 보상이라도 하 듯 한방에 몰아서 날 찾아왔다. 첫사랑이자 짝사랑이며 외사랑이 말이다. 어느 누구의 환영과 축복을 받지 못한 사랑이지만, 지금 이 사랑이 주는 사랑이 나를 벅차오르게 만드는 감정들로 꽤 복잡 미묘하지만 행복하다. 그저 그냥저냥 그를 사랑해서 몹시도 행복하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다. 사실 내 입장만 그렇지, 상대는 아니다. 내 사랑은 외사랑이라 상대의 마음은 나와 같지 않다. 왜 외사랑이냐고? 상대에게 내 마음을 고백한 것이 아니었다. 그냥 한 순간에 그가 내 마음을 알게 되었고, 그렇게 내 사랑은 그에게 들켜버려 졌다. 내 사랑에 그의 대답은 '고맙기도 하고 한편으로 미안하다'였다. 이 대답이 전부였다... 내가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가 분명하게도 안다. 툭 까놓고 정말 뻘쭘하고 어색하고 불편한 사이다. 혼자 몰래 짝사랑하다가 들켰는데 상대는 미안하다고 답했다. 짝사랑하고 있는 입장에선 힘 빠지는 대답이다. 실은, 어쩌면 상대는 내 사랑이 골칫덩어리일 수도, 거대한 똥파리로 여길수도 있다. 그러나 그 불편한 감정보다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지금은 훨씬 크다. 그래서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얼굴에 철판 깔고 그를 사랑하고 있는 중이다.
내 첫사랑은 마치 한 여름의 비처럼, 예고 없이 찾아왔고 마음 깊은 곳까지 서툴고 어설프게 적셔놓고는 금방 자취를 남기고 사라졌다. 첫사랑이었다. 그 순간 모든 것이 처음이었기에 찬란했다. 그의 사소한 말과 행동에도 설렘과 두근거림으로 하루종일 계속 그 사람 생각만 하게 만들었다. 첫사랑, 그 자체만으로 몽글몽글하고 소중하고 애틋한 조각이다. 첫사랑의 기억은 추억으로 남기기에 너무 찬란하다.
내 짝사랑은 마치 한 여름의 예고되어 있는 폭우처럼 내게 찾아왔다. 폭우에 젖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렇게 예고된 폭우를 알면서도 피할 새도 없이 온 마음과 온몸으로 폭우를 맞았다. 짝사랑이었다. 뻔히 알면서도 폭우를 피할 생각조차 하지 않고 맞아야만 하는 어쩔 수 없는 마음. 짝사랑, 그 자체만으로 슬프고 애달프고 아련한 슬픈 조각이다. 짝사랑의 기억은 추억으로 남기기에 너무 외롭다.
내 외사랑은 마치 가을에 몰래 내리는 도둑비처럼 소리 없는 가을비를 닮았다. 비가 내리는 것도, 비를 맞는 것도 어떤 쪽이든 조심스럽기만 하다.
하... 그는 왜 나와 같지 않을까.
이게 승부욕과는 전혀 관련 없는 일인데, 자꾸 승부욕이 생기려고 한단 말이지. 절대 절대 내 자랑이 아니다. 분명히 말하는데 절대 자랑을 하려고 하는 말이 결코 아니다. 나와 가까이 지내는 사람 중에 날 비호감이라 생각하는 남자는 단 한 명도 없다. 과거에도 그래왔었고, 현재도 그렇다. 사적이든, 공적이든 나이가 어리든, 나이가 많든 내 주변 남자들은 나에게 한없이 상냥하고 친절하다. 가끔 나의 사랑을 노골적으로 바라는 똥파리가 있긴 하지만, 그 사람들도 분명 나의 대한 호감으로 빚어진 결과다. 그러나 어른 남자는 아니란 말이야. 내 주위에 저만큼 늙은이가 없다. 저 정도 늙은이에겐 내가 비호감인가....?? 아니면 뭐가 다른 거지.... 분명한 차이는 하나 있다. 이 출판사에는 어른남자 말고는 죄다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뿐이라 낯설고 불안하다. 혹시나 나에게 말을 걸면 어쩌지 하는 불안으로 어른남자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고 사무실을 간다. 그러다 보니 그가 보기엔 나는 늘 긴장해 있고, 불안하고, 정신없는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보일 것이다. 그 외 다른 남자들은 내가 익숙한 장소, 익숙한 행동, 익숙한 모습들을 본다. 익숙하다 보니 내 행동도 자연스럽고 내 표정도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나의 익숙한 모습을 어른 남자는 결코 볼 일이 없고, 어른 남자는 아무리 익숙해도 사랑하는 마음을 몰래 숨겨두고 봐야 하기에 늘 나의 행동들과 표정은 부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래서 날 싫어하나? 불안하고 긴장해서? 그래서 그런가... 그런 거라면 그가 날 좋아할 일은 없겠구나...ㅠ

#삼천포 카페
"사장님!!! 자료를 빨리 주셔야 제가 마감을 하죠...ㅜㅜ 왜 맨날 늦으세요!!!"
"이렇게 해야 **씨가 직접 와주니까.... 제가 빨리 갖다 주면 손해죠?"
"하하.. 사장님 아시다시피 저 맨날 집에서도 원격 걸어두고 일해요ㅠ"
"고생 많으십니다. 머리도 식힐 겸 바다도 보고 회도 먹고 드라이브도 하시죠. 시간 맞춰 회사까지 모셔다 드릴게요"
"저 선약 있습니다"
"아니, **씬 선약이 없을 때가 있긴 한가요?"
"^^ 사장님, 커피 다 드셨어요? 이만 일어날까요?"
"벌써요?"
"버스 시간 다 돼서요"
"사무실까지 태워드릴게요"
"그냥 버스 타고 갈게요"
"선혜씨 옷이 너무 짧고 얇아요. 감기 걸리면 안 돼요. 제 차 타고 가요"
"아니에요. 번거롭게 안 그러셔도 돼요"
"저랑 아무것도 안 하신다면서요. 태워만 드리게 해 주세요!"
"아..... 네.. 그럼 감사합니다"
또 거절하지 못했다.. 이것도 병이다. 호의는 고마우나 부담스럽고 불편한데 상대방 생각에 거절 못하는 거...
#차 안
"사무실로 갈까요, 선약 있는 곳으로 갈까요?"
"사무실로 부탁드릴게요"
"그런데, 무슨 선약이에요?"
분명 나의 선약이 궁금한 게 아니라 말없이 가는 시간이 어색해서 하는 질문인 듯했다.
"사랑하는 사람 만나러 가요"
"누군지 몰라도 굉장히 부럽습니다"
어색하고 불편해서 창밖만 보고 있었다.
"** 씨, 이거 덮으세요"
무릎담요를 내게 건네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노래 틀어드릴까요?"
"네^^"
비스트-비가 오는 날엔
내가 좋아하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헬창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운동에 미친 사장님은... 꽤나 감성적인 선곡에 놀랬다. 풍기는 외모로 봤을 땐, 비트가 강한 음악을 들을 것 같았거든..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면서도 마음은 콩밭에 가 있다.
'그는 어떤 노래를 들으면서 운전할까'
어르신이니깐..... 내가 듣는 곡보다 더 이전의 노래를 듣겠지??ㅋㅋ 그 생각이 미치자 웃음이 새어 나왔다. 곧이어 사장님의 운전하는 모습을 눈여겨봤다. 절대 차가 작은 게 아니었지만 차가 작아 보일 만큼 진짜 건장하고 몸이 탄탄해 보였다. 핸들을 잡고 있는 손은 굉장히 컸고, 손목과 손등으로 튀어나온 핏줄까지 남성미 넘치고 섹시했다. 그러나 그게 전부였다. 거기에 대한 내 감정은 무반응이었다. 만져보고 싶은 생각과 마음이 전혀 생기지 않는 그냥 건강한 사람이 다였다.
'나는 왜 이토록 편집장님께 빠져있는 거지?'
'제대로 미쳤어 정말'
나는 또 웃고 말았다.
"진짜 사랑하는 사람 만나러 가는 거예요?"
"네 ^^ 진짜예요"
"와, 진심 그 남자가 부럽네요. 나도 선혜씨 같은 여자랑 연애하면 소원이 없겠어요 "
"ㅋㅋㅋㅋ사장님은 연애 안 하세요? 서류 볼 때 미혼이었던 거 같았는데... 맞죠?"
"네 아직 결혼 안 했습니다"
"못하는 건가요 안 하는 건가요?"
"와 **씨 질문 센데요?"
"제 질문에 실례였다면 죄송해요"
"아뇨 아뇨, 결혼하고 싶은데 못하는 겁니다. 맞선도 보고, 소개팅도 하는데 제 짝을 못만났어요"
"사랑을 하고 싶으신 거예요? 아니면 결혼이라는 제도를 하고 싶으신 거예요?"
"음... 맘 같아선 둘 다 하고 싶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결혼하고 싶다고 생각이 들면 너무 좋겠죠? 근데 그게 자꾸 나이를 먹을수록 힘드네요"
"그렇죠...."
"**씨, 페퍼민트 좋아하죠?"
"네. 너무 좋아해요"
"그런데 왜 아까는 입도 안 대셨어요?"
"아....... 살찔까 봐요"
"에?? 살 좀 쪄야 돼요. **씨 너무 말랐어요"
"안 말랐어요"
사실대로 말할까 싶다가도, 사실대로 말하면 '그런 이유면 마셔라, 화장실 같이 가주겠다'라고 대답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나의 어르신은 그 이유를 알고 있으면서도 물을 못 마시게 했다ㅡㅡㅋㅋㅋㅋ 나빠 진짜. 생각할수록 열받네? 나 그때 진짜 목말랐는데 마시지 말라고 했다ㅜㅜ 너무해.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 사무실 앞에 미끄러지듯이 도착했고, 내릴 필요 없는 데 굳이 사장님도 같이 내렸다.
"덕분에 편하게 잘 왔어요. 태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조만간 진짜 밥 한 끼 꼭 합시다"
"네..."
빈말이었다. 날 데려다주고 다시 삼천포로 가야 하는 번거로움에 대한 빈말이었다.
"진짜! 약속한 겁니다? 맛있는 거 사드릴게요"
"네. 저 때문에 다시 왔던 길 돌아가야 하는데.. 괜히 죄송해요"
"아닙니다. 제가 좋아서 태워다드린건데요 뭘"
"네.. 감사합니다. 그럼 먼저 올라가겠습니다"
"네. 카톡 보낼게요. 날 잡죠"
#사무실
"사무장님!!!!!!!!! 저 이번에 바쁜 일만 끝나면 위에 말해서 꼭 사직 처리 해주세요"
"또 왜"
"그만두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