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편소설)#1-154 경로를 이탈하셨습니다

#지난날
그날은 모든 게 서툴렀고 어색했다. 많은 대화를 하는 사이는 아니었다만, 처음 그의 손이 내게 닿았던 날, 그 순간부터 급격히 말수가 적어지고 서로를 마주하는 시선이 다소 조심스러웠다. 그리고 마침내 침묵 속에서 그는 내게 닿았다. 익숙한 공간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지고 이미 알고 있던 그의 손길이 새로운 감각으로 내게 다가왔다. 그의 손끝에서 전해지던 떨림. 숨죽이며 내뱉어지는 작은 숨소리가 공간을 빠르게 채웠고, 시간이 멈춘 듯했다. 그와 내게 처음 있는 일이라 서툴고 어색했다. 그가 내게 다가오는 속도는 굉장히 신중했고, 그 속에서도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컸던 나는, 긴장과 설렘이 주는 떨림이 얼굴에 드러났을 것이라 생각된다. 작은 접촉마저 내게는 미묘하고도 깊이 각인되는 순간이었다. 그때만큼은 그에게 더 가까워질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벅찼다. 나의 몸과 마음이 그와 함께 하기를 갈망했었다. 마스크를 쓰고 있었지만 그의 표정은 늘 한결 같이 변함없었다. 어딘가에 집중하면 미간을 찌푸리는 버릇이 있는 표정, 딱 그 얼굴이었다. 반면 나는 심장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요동쳤다. 사실, 그의 표정만으로 봐서는 그날이 공적인 일인지, 아니면 사적인 일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묻지도 않았지만, 물었는데 공적인 행동이었다고 대답한다면 나는 실망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 시작이 공적이었는지 알아야 한다. 그래야 그와 이별 후 다른 편집장님과 불편해지지 않겠지.

#약발이 너무해
평소 '약발이 잘 받는다' 소리를 자주 듣는다. 그리고 이 말을 뒷받침할 수 있게 내 몸이 증명해준다. 통증을 극도로 싫어하는 나는 병원 방문이 잦다. 그럴 때마다 진료를 받고 약을 처방받아온다. 근육통이든 두통이든 빈혈이든 이명이든 약을 먹고 나면 통증이 완화되는 느낌을 잘 느낀다. 예민해서 인지 아니면 심리적인 건지 잘 구별되지 않지만, 나는 그 느낌이 묘하게 좋더라. 일단 통증 완화에 도움이 주니 더 그런 듯싶다. 매년 독감예방접종을 맞는데 맞고 나면 항상 아프다. 그러나 맞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혹시나 모를 독감으로 속수무책으로 아프기 싫어서이다. 잘 안 쓰는 오른쪽을 맞았어야 하는데 왼쪽 어깨에 접종을 했다. 몸속으로 약기운이 퍼지는 느낌도 싫지만 곧 있음 몽롱해지고 자꾸 힘이 없어지며 우리우리한 팔의 느낌 또한 싫다. 그리고 이내 열이 오르고 만다. 매년 같은 증상. 하루 지나면 괜찮아진다. 그래서 엄마집으로 갔다.

#경로 이탈
해열진통제를 먹고 열은 떨어지지 않았지만 조금 살만 해졌다. 내가 좋아하는 소고기죽을 끓여주시겠다며 아침에 출근 전에 한 그릇 먹고 가라며 마트를 나서는 엄마를 붙잡았다. 이제 괜찮다고 귀찮게 끓이지 말라고 했지만, 엄마 고집을 꺾지 못했다. 역시 내가 고집 센 건 엄마를 닮았나 보다. 결국은 내가 에코백을 하나 어깨에 메고 마트로 향했다. 약기운 인지 접종한 덕분인지 걷고 있는 발걸음에 무게를 느끼지 못하고 붕~뜬 기분이 들었다. 마트에 들어섰고, 어른 남자와 매우 닮은 남자가 있었다. 뒷모습만 봐도 한눈에 그를 알 수 있었다. 팔에 깁스가 없는 걸 보니 다 나았는가 보다 싶었다. 그를 피해 둘러둘러 장을 봤다. 우리 집 근처와 진열 방법이 달라 헤매다가 결국 또 마주쳤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눈을 돌렸고 장 보기에 집중했다. 그놈이 킨더조이는 왜 안 보이는 거야ㅜ 한참을 돌아다녔고 결국 찾지 못했다. 과자 코너에서 맴돌다 그가 내게 와 물었다.
"뭐 찾으세요?"
"아... 킨더조이요"
그가 앞장섰고, 뒤를 따라가다 멈춘 곳에 그토록 찾던 킨더조이가 있었다.
"감사합니다"
"네"
장을 보던 중에 갓 짠 참기름 냄새가 너무 고소해서 한 병 사러 발길을 돌렸다. 왼손잡이인 나는 참기름 병을 무의식적으로 왼손을 뻗었고, 접종으로 아픈 팔이 갑자기 움츠려 들어 놓치고 말았다. 참기름 담은 병이 깨지고 말았다. 삽시간에 마스크 속으로 참기름의 꼬신내가 진동을 했다.
"죄송합니다"
깨진 병과 바닥을 엉망으로 만든 참기름을 수습하기 위해 쭈그려 앉아 깨진 병을 주웠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고,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참기름을 짜고 계시던 판매원이 내 손에 피가 나는 걸 보고는 내게 오셨고, 다친 거 아니냐고 물으셨다.
괜찮다고 대답하고, 다른 손님들께 방해될까 봐 내가 저지른 사태를 수습을 했다. 다른 직원들이 밀대와 물티슈 휴지 등등 가져와서 같이 정리를 했다. 누군가 쪼그려 앉은 내 팔목을 잡았고 일으켜 세웠다. 어른 남자와 닮은 그였다.
"괜찮으세요?"
"괜찮아요"
"여기는 직원들이 하면 되니깐 지혈부터 해요"
"아니, 괜찮아요. 아프지 않아요"
"일단 와요"
다른 직원들도 그를 보고 여기 마무리는 본인들이 하시겠다며 가라고 재촉하셨다. 그에게서 손목을 비틀어 팔을 빼고 지갑에서 5만원권 2장을 꺼내 참기름 진열대에 올려두고 사장님께 다시 사과드렸다.
장본 바구니를 그가 들었고, 앞장서서 저만치 갔다.
"저기요?? 제 바구니 주세요"
"따라오세요"
바구니를 계산대 옆에 두고 그는 다시 앞장을 서서 저만치 걸어갔다. 나는 바구니를 들어 그를 등지고 셀프계산대로 향했고, 그는 다시 내게 와서 붙잡았다.
"잠시 따라와요"
"바로 앞이 집이라 괜찮..."
내 말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바구니를 내게서 가져갔다.
"손님, 매장에서 다치셨어요. 따라오세요"
조금 전보다 큰 소리를 내게 말했고, 다른 사람들 시선이 집중되는 게 부담스러워 나는 작게 대답했다.
"네...."
그렇게 나는 입고 있던 소매 끝자락으로 피를 슥 닦으며 그를 따라갔다. 직원들만 들어가는 곳, 10년 넘게 마트를 왔지만 처음 와본 곳이었다. 앞에 가던 그가 멈췄고, 나도 따라 멈췄다. 뭔가 찾는 듯했고, 곧 내게 왔다.
"어디 봐요"
"진짜 괜찮아요 피도 안 나고..."
표정을 보니 내 말이 씨가 먹히지 않을 걸 알았고, 나는 왼손을 내밀었다. 소매가 긴 니트를 두 번 접고 상처에 소독을 할 모양이었다. 손을 얼른 숨겼다. 소독은 따갑고 아프니깐 말이다 ㅠㅠ
"진짜 건너면 바로 집이에요. 집에서 손 씻고 밴드 하나 붙이면 끝이에요. 상처도 깊지 않고 살짝 긁혔나 봐요"
아니... 내 말이 안 들리나?? 사람 말에 무시 나하고;;;
진짜 어른 남자와 닮지만 않았으면 그냥 박차고 왔을 것이다... 그럴 용기는 없겠지만 그래보려고 했을 것이다.
일회용 알코올솜을 뜯었고 소독을 할 모양이었다. 내 얼굴에 있던 마스크를 풀고 다시 말했다.
"소독하기 싫다고요. 아픈데 더 아프게 할 셈이에요??!!!"
분명 나도 듣기 좋은 소리로 말하지 않았다.
"금방 끝나요"
그는 내 손목을 잡았고 그제서야 그가 내 얼굴을 봤다.
"어디 아파요?"
"아뇨. 안 아프다고 했잖아요"
"아니, 손 말고 어디 아파요?"
"안 아파요"
"너무 뜨거운데요?"
"아.. 괜찮아요"
상처가 깊지 않아 알코올 소독은 많이 따갑지 않았고 참을만했다. 면봉으로 후시딘을 듬뿍 아주 듬뿍 짜서 바르고 아주 큰 밴드를 붙여주었다. 누가 보면 많이 다친 줄 알겠다....
"다 됐어요"
"감사합니다"
인사말과 함께 짧게 고개를 숙이고 뒤돌아 나왔다.
자주 보던 마트 캐셔이모님께서 날 걱정해 주셨고, 나는 조금 긁힌 거라 말씀드렸다. 셀프계산대에서 계산하고 에코백에 넣고 다 들어가지 않는 짐들은 손에 들고 마트를 나섰다.
"제가 들어드릴게요"
예상치 못한 그가 갑자기 나타나서 화들짝 놀랬다 ㅠ
"괜찮으세요??"
"괜찮아요. 놀래서 그래요.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들어드린다고요. 집이 근처라면서요?"
"네. 근데 제가 들고 갈 수 있어요"
"주세요. 짐만 들어드릴게요"
내 어깨에 맨 에코백을 그가 가져갔고, 같이 걸었다.
긴 신호등을 기다리면서도 한마디 하지 않았고, 어색했다. 아파트 입구에서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이제 주세요"
"앞에까지 가요"
그 말과 함께 앞장서서 걸었다. 슬리퍼 신은 나는 그를 따라갔고 집도 모르면서 긴 다리로 슝슝 갔다. 그리고 나는 그를 멈춰세웠다.
"여기에요"
1층인 엄마집 대문 앞에서 그제서야 에코백과 짐들을 건네받았다. 그리고 말도 없이 그가 뒤를 돌아갔고, 나는 붙잡았다.
"여러모로 감사합니다"
짧은 목례만 남기고 긴 다리로 다시 슝슝 갔다.
엄마집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갔다. 순간 긴장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았고 다들 내게 참기름 냄새가 심하다고 이야기했다.
짝퉁 어른 남자 말고, 진짜 어른 남자가 보고 싶다.
살도 다시 뺐고, 얼른 보러 갈 일만 남았다.
경로를 이탈해도 어차피 내게 목적지는 한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