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편소설)#1-131 사랑은 없지만, 사랑은 있다

#추억은 힘이 없다
시간이 지나면서 종종 추억 속에 잠겨 살아간다. 지나간 일들을 기억하고 그 속에서 위로를 받기도 하고 행복에 잠기기도 한다. 그러나 추억은 결코 우리를 현재로 이끌어주는 힘이 없다. 그저 안개가 자욱하게 낀 먼 산처럼 흐릿하게 보이는 것처럼, 그저 거기 머물러있을 뿐. 그 추억 속의 나와 지금의 내가 같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추억이 얼마나 무력한지 깨닫는다. 추억 속의 감정과 느낌, 그리고 사랑도 지금의 나를 결코 움직이지 못하는 먼 과거일 뿐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과거의 기억이 자연스럽게 아름답게 포장되어 내가 기억하고 싶은 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남게 된다. 그래서 때때로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때로 돌아간들 그때 느꼈던 똑같은 감정을 다시 느낄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미 나는 그때의 내가 아니고, 그 순간의 감정도 다시는 같은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추억은 힘이 없다. 아무리 그 기억을 끄집어내고 추억해도 현재의 내 삶에 실질적인 양향을 주지 못한다. 추억 속에 그를 추억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사랑을 주제로 글을 쓰는 나는, 내가 해본 사랑으로 앞으로의 글이 조금은 어려워졌다. 사랑을 해보기 전에는 강렬하고 모든 것을 아우르는 감정처럼, 사랑이 시작되면 서로의 삶을 지배하는 것이라 믿었고 그렇게 글을 썼었다. 그러나 현실의 사랑은 다르다. 달라도 너무도 다르다. 사랑은 때론 행복하게 만들지만 때로는 복잡하고 아프다. 사랑은 가슴 설레게 하지만 때로는 고통을 주기도 한다. 사랑은 나를 살게 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나를 죽이기도 한다. 고로 사랑은 복잡하며 어렵다. 잘 모르겠다. 정확한 건 하나 있다. 사랑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려고 한다.
#나에게 사랑은 있지만, 그에겐 없다.
흐르는 물을 손으로 막을 순 없다.
움켜쥐려 할수록 마음만 괴롭다.
지나간 추억이든 사랑이든 소중하다고 붙잡아둘 순 없다.
강물이 흘러 바다로 가듯 미련과 그리움도 떠나보내야 한다. 말이 쉽지.. 그게 쉬울까? 진짜 말만 청산유수다.
젠장.
빌어먹을.
썅썅바.
이럴 땐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는 내가 참말로 얄밉다.
내게서 그를 사랑하지 않는 일은 단연코 처음부터 하지 못할 일이었다. 그래서 그냥 그가 내게서 흘러가길, 그냥 지나가길 기다리기로 했다. 전에 말했듯이 사랑에 유통기한도 있고, 콩깍지에도 유통기한이 있듯이 말이다. 그때를 기다리자는 말이다. 지금이야 어른 남자 모든 면을 사랑하지만, 그 유통기한이 지나면 삐쭉 나온 뱃살도 동네 아저씨처럼 나온 뱃살처럼 미워 보일 것이고, 웃을 때 눈꼬리 쳐지며 생기는 진한 주름도 미워 보이는 날이 분명 오겠지. 이번달까지만 그를 사랑하겠다 큰소리쳐놓고 이게 무슨 일인가 싶지만, 나에게는 이게 최선이다. 사실 나는 꽤 복잡하고, 섬세하고 예민한 줄 알았다. 아니었다 ㅎㅎ 난 단순했다. 항상 매사에 답이 정해져 있는 아빠와 계산적인 엄마의 유전자가 나를 만든 것이 분명함을 피부로 깨닫는 순간이었다. '이번달까지만 하고 끝이야!' 했을 때와 '그래, 내가 언제까지 그를 사랑하겠어? 쭈글쭈글 영감탱이 되는 게 미워 보이면 그땐 나한테 매달려도 안 볼 거야!' 할 때랑은 완전히 다르다. 그냥 순리대로 내 마음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둘래. 내 마음이 바뀐다고 뭐 하나 달라지는 건 개미 똥꾸멍만큼도 없으니까.... 그럴 바에 그냥 그가 미워 보일 때를 기다리는 편이 나으니까. 언젠가는 보기 싫은 날이 오겠지. 안 오려나? 안 오면 어쩌지? 괜찮아.. 어른 남자도 많이 사셨고, 앞으로는 지구에서 사는 이상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으니 못나지겠지. 그래, 옛다 내가 진짜 인심 써서 사랑해 주는 거다.
그를 향한 내 마음을 그대로 두기로 하고 나는 다시 마음이 편해졌다. 나는 여전히 그를 사랑하지만, 그에겐 없다. 강요하지 않는다. 바라지도 않는다. 오히려 잘 된 일인지도 모르겠다 생각 든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이, 사랑이 아님에 잘 된 일이라 보는 어쩔 수 없는 짝사랑이다. 그렇지만, '옛다! 내가 인심 써서 너 사랑해 주는 거야'라고 생각할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