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 글쟁이/엽편소설

엽편소설)#1-83 가득차다

호호아줌마v 2024. 9. 30. 01:29


나는 처음부터 그를 사랑하게 될 운명이 아니었을까.
내가 그를 좋아했던 이유는 없다. 그냥 그가 좋았고 그래서 그를 좋아했고, 그러다 그가 걷잡을 수 없이 점점 좋아지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가 좋아지게 된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내 눈에 잘생겨서, 어른 남자라서 그런 이유들이 있지만 그를 좋아한 건 정말 어떠한 이유와 설명 없이 생겨난 내 마음이었다.
짝사랑이 외사랑이 이렇게 아프고 다치고 고통스러울지라도 여전히 그를 사랑한다고, 계속 그를 사랑하고 싶다고, 그를 보면 자꾸만 마음이 커진다고. 그러나 언젠가는 곧 나는 분명 그를 비워낼 것이다.
그가 내 마음속으로 한달음에 달려와 나를 휘청이게 하고 무너지게 하고 결국 속절없이 그에게로 빠져들게 만드는 일을 수없이 반복하지만 그를 완전히 비워내어야만 한다.
내 사랑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 수 있어서 그 사랑을 드러낼 수 없었기에 그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다다르지 못할 곳을 바라보며 서서히 말라가는 일이다. 내가 한 사랑의 대가로 스스로를 상처 내는 일. 그뿐이다.

그가 너무도 보고 싶을 땐, 그와의 일들을 다시 곱씹으며 추억하는 일을 나는 종종 한다. 가장 최근에 만났을 그를 제일 먼저 떠올리며 점차 과거로 들어가는데..
내 기억 속 마지막은, 그가 내 사랑을 알았을 때였다.
내 사랑을 분명 그가 알았음에도 날 향해 오는 그의 입술은 한없이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분명 짝사랑할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그날 나에게 그를 탐하고 싶은 욕망만 있는 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그냥 온전하게 그를 다 갖고 싶은 이기적이지만 솔직한 내 마음이었다. 그를 탐하는 동안만큼은 그는 누구의 것이 아닌 오롯이 내 것이니깐. 그래서 인 거 같다.
내 마음을 알고 난 후에도 나에게 오는 그의 입술과 손길이 연민인지 아니면 동정인지는 정확히 모른다. 그래도 내 마음에 부정하지도 밀어내지 않아서 좋은 걸로 치자. 그걸로 만족하자.
사실 난, 내 사랑을 그가 알고 난 후 그의 키스가 더 좋았으니까.


뭐 때문인지 의도는 모르겠지만, 그가 나에게 '요리를 자주 한다? 자주 해줬다?'라는 소리를 했다.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 몇 번 그에게서 들은 말이다. 뭐지? 요리 잘한다고 나에게 자랑하는 건가...?? 굳이 왜 자랑해? 검증해보지도 못할 건데?? 아니면 누군가에게 요리를 자주 해줬다고 나의 배알이 꼴리게 하고 싶은 건가?

<배알이 꼴린다의 우리말에 대해 잠시 알아보자. 배알은 창자를 낮추어 말하는 비속어에 이르는 말이다. 한마디로 배알이 꼴린다의 의미는 속이 뒤틀려 배가 아프다의 뜻이다>

그의 말에 나는 일부러 대답하지 않았다. "네, 자주 종종 요리 많이 해서 맛있게 드세요^^"라고 말하기엔 내가 너무 속좁아 보이니깐 말이다. 젠장 빌어먹을.
욕을 안 쓰기로 다짐했건만, 욕을 안 쓰고는 넘어가질 않으니 써야겠다. 그래, 여긴 엄연히 내 공간이니 내가 쓰고 싶은 대로 쓰겠다!!

그는 이렇게든 저렇게든 본의 아니게 한없이 나에게 상처를 주고 있지만, 나는 속도 없이 그런 그가 마냥 너무 좋다. 나에게 해준 모든 말과 행동들을 잊기 싫어 계속해서 그날의 기억을 더듬는다. 모든 글과 향기, 심지어 내가 듣는 노래까지 온통 그로만 가득 차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