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편소설)#1-76 가을 바람을 타고
유난히 이번 여름은 정말 뜨거웠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무더위도 어느새 스르륵 물러가고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만이 우리 곁을 맴돈다.
오늘 아침 출근길, 도로에 일렬로 줄지은 나무들 틈에서 나뭇가지와 나뭇잎을 지나 나를 휘감는 가을바람 한점.
가을의 기운을 잔뜩 품은 바람은, 내 허벅지를 타고 치마 속을 파고들어 등을 타고 목을 타고 올라와 순식간에 온몸을 휘돌았다. 쌀쌀해진 바람이 내 몸을 어루만진다는 생각에 그가 갑자기 훅하고 나에게 찾아왔다. 갑자기 예기치 못한 내 출근길이 그로 인해 어지러웠고, 잠시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눈을 감아버렸다. 그리고 그와 함께 출근했다. ^^
당분간 비는 잡혀있지 않았다. 비가 되어 내 사랑이 그를 찾아가는 일은 없겠지. 이젠 가을바람이 내 사랑을 타고 그에게 닿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내 사랑을 가을에 걸어보기로 했다. 오늘처럼 바람 한 점이 그를 휘감을 때면, 내 사랑이 그를 찾아간 것이다.
그는 알까? 모르겠지. 절대. 똥멍청이 같은 어른 남자.
#며칠 전 사무실
"과장님, 커피 드세요"
우리 팀이 아닌 다른 팀의 막내가 점심 식사 후 커피를 내게 건넨다. 한두 번이 아니었다. 매번 사비를 들여 같은 카페에서 같은 커피를 주는 것이었다. 요즘 보기 드문 맑고 밝은 20대 여직원이 말이다.
사실 나는 커피를 좋아하지 않는다. 딱히 좋아하고 말고를 떠나서 수면에 방해된다는 커피를 일부러 마시지 않는다고 보는 게 맞는 표현인 듯싶다.
내게만 커피를 주는 이유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전에는 "제가 과장님 정말 존경하잖아요!! 제 마음이에요 받아주세요^^" 그러나 며칠 전에는 커피를 건넨 직원의 표정이 어두워 보였고, 커피를 건네받은 나는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씨, 무슨 일 있어?"
"아니에요"
"왜에~ 내가 도움이 될 수 있잖아? 말해봐요"
그녀는 내게 그동안의 일을 고백했다.
내용은 이러했다. 첫 출근 후 회사 근처 카페 아르바이트생에게 첫눈에 반했다는 것이다. 점심 식사 후에 거기서 자기가 마실 커피를 사서 오고, 잠시 후에는 내 커피를 핑계로 다시 그 카페에 갔던 것이었다. 오로지 그를 보기 위해서. 그녀는 짝사랑 중이었다. ㅋㅋㅋㅋㅋ
한 번은 커피를 두 잔 주문해서 한잔은 아르바이트생에게 주고 왔던 일도 있었다고 했다. 매일 들리다 보니 미리 주문하지 않아도 그녀가 오면 커피를 준비한다고.. 그러나 그 아르바이트생이 이번달까지 하고 알바를 그만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해맑은 여직원이 시무룩했던 것이다.
이름은 명찰 보고 알고 있고, 아르바이트생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다. 왠지 나와 비슷한 상황에 그녀에게서 동병상련을 느꼈다.
"**씨는 젊고 예쁘니깐 아르바이트생한테 번호 달라고 해보지 그랬어?"
"싫다고 할까 봐 용기가 안 나요"
그 맘 알지. 정말 잘 안다.
"짝사랑 그거 그냥 내버려두면 큰일 나. **씨는 어쩌고 싶은데?"
"잘 모르겠어요. 알바 그만둔다고 하니깐 그냥 아쉬운 건지... 뭔지 모르겠어요"
"그럼 그냥 친하게 지내자고 연락처라도 물어봐"
"저 싫다고 하면 쪽팔려서요"
그렇게 시름시름 오늘도 앓고 있는 예쁘고 어린 직원이 안쓰러웠다. 보다 못한 내가 그 카페를 찾아갔고,
내 목이 걸린 사원증을 보여주며 아르바이트생에게 말했다.
"안녕하세요. 저 앞에 사무실에서 일하는 여직원이 있는데요, 그 친구가 총각을 좋아해요"
라고 냅따 불어버렸다. 그리고는
"매일 디카페인 커피 사러 오는 직원 아시죠?"
"네네 알아요"
"그 직원, 커피도 안 좋아하고, 저도 커피 안 좋아하는데 그쪽 보러 매일 커피 사러 와요"
"아..."
"그럼, 제가 조금 있다 우리 직원한테 커피 심부름 시킬게요"
내가 하고 싶은 말만 내뱉고 카페를 나와버렸다.
그녀의 짝사랑만큼은 내가 계기가 되어 여지를 주고 싶었다. 그녀에게 내 개인 카드를 주고 아이스아메리카노 커피 5잔을 그 카페에서 사오라 시켰고, 우물쭈물하다가 이내 내 카드를 받고 내려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녀는
"과장님!!!!!!!!!"
날 부르는 목소리가 이미 행복이 넘쳤고, 그 목소리만 들어도 뭔가 이루어짐을 느낄 수 있었다ㅋㅋㅋ 날 보자마자 폴짝폴짝 뛴다.
"과장님 제가 이래서 과장님 존경한다니깐요 완전!!!!"
"어떻게 됐어?"
"어떻게 되긴요. 아르바이트생이 연락하고 지내자고 먼저 이야기하더라고요! 알바기간 끝날 때쯤 연락처 주고받아야 하나 고민했었데요"
"잘 됐다. 축하해"
"이게 다 과장님 덕분이에요"
짝사랑의 끝에는 딱 두 가지 결말만이 존재하는 이분법이다.
사랑을 이루거나 혹은 단념하거나.
내 짝사랑의 결말은 단념이다.
그러나 짝사랑의 이 두 가지 결말 말고 그 사이에 어딘가에 선택지가 하나 더 있으면 좋겠다. 사랑을 이룰 수도 그렇다고 단념할 수도 없는 나 같은 사람을 위해서 말이다.
예쁘고 밝고 젊은 직원이 오늘따라 많이 부럽다.
예뻐서 부러운 것이 아니다.
밝아서 부러운 것이 아니다.
젊어서 부러운 것이 아니다.
사랑을 할 수 있는 그 자격이 부러울 뿐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관심을 갖게 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녀와 아르바이트생은 알기나 할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