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편소설)#1-74 동경이어야만 했다

내가 그에게 입을 맞추던 순간,
온 세상이 멈춘 듯했다.
몰래 상상만 했던 일이 그를 통해 현실이 되었지만,
정작 내 마음은 왜 이리도 어지러운지 이유를 찾지 못했다. 이유를 찾기 위해 수백 번, 수천번 장면을 돌려보아도 입을 맞추던 순간에는 이유가 분명 없었다. 내가 먼저 한 입맞춤이었지만 그도 입을 열어 나를 맞이했기에 그 장면에서는 이유를 찾을 수 없음이 당연했다.
이제야 정답에 가까운 답을 찾았다.
동경이어야만 했다.
동경이라는 감정으로 끝내야 했었다.
사랑에 도달하게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 일을 후회하진 않는다. 곱씹어 보아도, 다시 그때로 다시 돌아가도, 나는 당연히 그를 내쪽으로 끌어다 입을 맞췄을 것이고, 먼저 입을 열었을 것이다. 틀림없다.
그러나 그전에 이미 마음대로 날뛰는 마음을 동경으로 잠재워야 했다는 걸 의미한다.
동경이라는 거짓 마음을 믿고 더 버텼어야 했다.
끝까지 버텼어야만 했다.
그를 향한 마음을 동경이라 철저히 속였어야만 했었다.
그를 향한 마음이 사랑이라는 걸 알고부터 항상 어딘가 마음이 조금은 불편했었던 이유를 이제서야 알았다.
짝사랑이 주는 애달픔이 아니었다.
사랑이 시작됨과 동시에 나는 그를 잃을 수도 있다는 현실에 대한 속상함과 원망, 그리고 억울함이었다.
그러나, 다시 동경인지 사랑인지 헷갈렸을 때로 돌아간다면 나는 또 사랑임을 분명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사랑을 선택했을 거다. 나는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럴 수가 없다.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를 처음 본 날부터 그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기에.
그의 열린 입술이 날 향한 온전한 사랑이길 바라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내가 처음이라는 그의 달콤한 말이 나에 대한 마음이라 생각하면 안 되는 일이었다. 그의 따뜻한 손길이 나랑 같은 마음일 거라고 착각하면 안 되는 일이었다. 날 품고도 남은 그 넓은 어깨에 기대고 싶다는 욕심을 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가 내 안에서 꽉 찼을 때 내 것이라 생각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와의 시간에서 행복을 맛보아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를 기다려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다, 다다다다 전부다 죄다 안 되는 일뿐이다.
나에게 되는 일은 단 하나다
그를 나에게서 정리하는 거. 그뿐이다. 나도 안다.
우습게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나는 지금 죄다 안 되는 일만 하고 있다.
빌어먹을.썅.
그리고, 누가 감히 동경을 이딴 식으로 정의해 둔 거야.
내가 봤을 때 동경과 사랑의 비슷한 말이나 유의어가 아니라 분명, 동경은 사랑과 같은 말이다. 굳이 왜 동경이라는 단어를 만들어 사람을 헷갈리게 한 것이냐!!!!
사랑과 동경은 구분하기 어렵다.
그 어려운 걸 말장난이나 하는 작가가 어찌 아냐고ㅠ
정말이지, 나는 그를 향한 동경이든 사랑이든 뭐든 간에
내려놓고 싶다. 못해먹겠다. 내가 내 스스로를 갈아먹고, 그것도 모자라 내 영혼까지 갉아먹고 있다.
사실은 진짜 사실은, 마음만 먹으면 가위로 싹둑 잘라내면 잘릴 줄만 알았다. 무지해서 오는 자만이었다.
그리고 나는 진짜 자만했다. 나는 꽤 괜찮은 사람이고, 마음도 건강한 사람이라, 도를 넘거나 선을 넘으면 발을 쉽게 뺄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무뎌진 칼날이 문제였을까 왜 그는 잘려나가지 않는 걸까
내 나름대로 자르고 또 자르고 또또 잘라내고도 아직도 그의 흔적은 여전히 내게 남아서 날 흔들고 있다.
그는 나를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나도 그를 쉽게 못 놓고 있다.
계속 그를 맴도는 나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만약에, 진짜 만약에 고백으로도 해결이 되지 않으면 그다음 차선책은 지금 나에겐 없다. 아마 죽여야겠지? 글을 쓰다가 막히거나 하면 나는 필명을 죽이고 다른 이름으로 글을 쓴다. 내가 쓴 글로부터 도망과 도피를 선택한 것이다. 이번에는 내 마음을 죽이고 나면, 그에게서 도망이 가능할까?
그래, 도망갈 수 있을 때 도망가자. 더 시간이 지나면 도망가지 않고 머물기를 선택할 수 있으니 말이다.
이번이 진짜 마지막 기회다. 고백을 약속 잡고 오자. 이제 나에게 선택의 여지가 분명 없음을 느낀다.
다른 건 생각하지 말자. 내 고백에 그가 어떤 반응을 할진 모르겠으나, 결과는 같다. 처음부터 결과는 똑같았다. 한치도 변함없다. 욕심을 낸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결과만큼은 내가 건들 수 없다. 내 사랑이 그가 불행해지는 건 죽어도 싫으니깐. 내 사랑으로 그를 부담스럽게 할 생각도 추오도 없다. 나는 그냥 한번 지나가면 끝인 바람일 뿐이다. 그래, 바람. 그 옆에 있는 정확한 내 모습이다.
그러나 그 바람이 너무 커지는 비람에 무거워서 지나갈 수 없다. 잘게 잘게 뿌셔야 지나갈 수 있을 듯하여 나에게 고백은 꼭 필요하다.
고백하기 전에 꼭 먼저 해야 하는 말이 있다.
"제가 하는 고백은 제 사랑받아달라는 고백이 결코 아니에요." 달달 외워서라도 앵무새처럼 뱉어내야 하는 말이다. 이 말을 먼저 내뱉지 않고서는 "과장님 많이 좋아하고 있어요"라는 말로 고백해 버리면 난감하니 말이다. 고백하는 날은 약을 먹기로 하자. 이성적인 생각과 판단을 할 수 있게 나를 이성적으로 만들고 그 앞에 가기로 말이다.
그를 나에게서 쫓아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어느 틈엔가 그가 너무도 보고 싶다. 보고 싶은 게 아닐 수 있다고 애써 부정해 본다. 갑자기 찾아온 가을 탓으로 돌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