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편소설)#1-50 가벼운 장난일지도

뛰지 말라 했다, 달리면 안 된다고 했다. 그럼에도 마음이 시끄러워서 나는 오늘도 땀복을 갈아입고 러닝 하러 나갔다. 아직까지 날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그의 명분을 나에게서 떨쳐내고 싶었다. 우리 집에서 그가 있을지도 모를 사무실 근처를 6번을 뛰고 나서야 멈출 수 있었다. 심장이 터질 거 같았고, 늘 차가운 발바닥이 뜨거워짐에 기분이 좋았다. 뭔가 뭐든 해낼 수 있을 거 같은 느낌에 나는 징검다리로 향했지만, 결국은 건너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긍정적인 사람이다. 징검다리는 과감히 포기하고 다리로 우회해 대나무 숲길을 걷기로 했다.

그 당당하던 용기와 자신감은 대나무 숲길 앞에서 나를 멈춰 세웠다. 또 그때와 같은 상황이 생기면 어쩌지? 설마 그때 그 어린 학생들을 다시 만나면 어쩌지?라는 생각이 들면서 불안이 시작되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나는 '아직 일어나지도 않을 일에 불안 해하지 말자. 만약에 그런 일이 있다면 그때처럼은 당하지 않겠다. 설사 그때 그 학생들을 만나면 내 49만 5천 원을 돌려받을 거다'라는 묘한 자신감이 들었고 나는 대나무 숲으로 들어갔다.
사실 정확하게는 그의 예매한 명분에 대한 화풀이를 누군가에게 하고 싶었다. 그 화풀이 대상이 대나무 숲길이 되었다. 오늘따라 나의 용기 없고 소심하고 내성적인 내가 한없이 싫었다. 그래서 날 몰아세웠다. 항상 날 벼랑 끝으로 내모는 건 타인이 아니라 나였음을 깨달았다. 날 이렇게 키워주신 부모에게 향하는 화살 과녁을 겨우 대나무숲길 앞에서 방향을 바꿀 수 있었다. 나는 삼십 대 중후반 곧 마흔 인 중년이다. 여전히 무섭고 불안한 일이 온통 투성이지만, 이제는 하나씩 부딪혀서 이겨내 보기로 했다. 강한 사람이 되고 싶다. 몸도 마음도 정말 단단한 사람이 되고 싶다. 아무에게나 휘둘리거나 흔들리지 않는 뿌리 깊은 사람 말이다.
더 이상 몸 사리고 날 아끼는 건 그만두기로 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는 없는 일이지 않는가. 지금은 그의 명분이 "장난"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이렇게 휘청거리지만, 지나고 나면 이 또한 별일 아닌 일이 될 때까지 강해지고 싶다. 그렇게 될 수 있을까?
뭐 때문에 이토록 내 기분이 상한지 아직 잘 모르겠다.
그의 마음은 내가 어찌하지 못하는 건 알고 시작한 사랑이었다. 장난이든 호기심이든 원래 바람둥이든 뭐든 간에 상관없었다. 설사 그렇다고 한들 내가 그에게 가서 따질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나만 하는 사랑이니깐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행동에서 날 비호감이나 극혐까지는 아닌 듯 느껴졌고, 혹시나 날 좋게 봐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행복했던 나를 그가 기만한 거라 생각 들어서 기분이 나쁜 건가? 사실 잘 모르겠다.
분명한 건 나는 그의 마음을 확인할 수도 없고, 확인한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다는 사실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내 상황에 화가 나는 거 같다.
하루빨리 내 사랑을 끝내는 게 나의 정신건강에 좋을 듯하다. 그가 미운데도 그가 끊임없이 너무 좋다. 짝사랑이 이렇게 무서운 거다. 한없이 나를 구질구질하고, 지질하게 만들지만, 금방 또 나를 그로 가득 채우게 만든다.
차라리 그가 내 글을 보았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그래서 차라리 그가 먼저 날 피하거나 밀어내면 내가 좀 더 단념하기 쉬울 텐데..
빨리 고백을 앞당겨야겠다. 그가 1층까지 배웅해 준다면 사무실 말고, 밖에서 나한테 1시간만 시간을 내어달라,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부탁드린다고 말해야겠다.